당국 '무과실 배상' 압박에…은행권, 계좌 사전통제 강화
2026-04-21 17:26:37 2026-04-22 07:46:11
 
[뉴스토마토 이지유 기자]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무과실 배상책임제' 도입을 추진하는 가운데 은행권이 계좌 관리 및 이상거래 차단 체계 강화에 분주한 모습입니다. 무과실 배상책임제는 금융사의 고의·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도 금융권에 피해액을 물어주게 하는 제도인데요. 은행들은 기존 사후 탐지형에서 벗어나 사전 차단형 리스크 관리로 대응에 나섰습니다.
 
'사후 탐지 대신 사전 차단' 집중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 시중은행들은 휴·폐업 법인 계좌 등 장기 미사용 계좌에 대한 관리 범위를 확대하고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대포통장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은 계좌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우리은행은 폐업 상태 법인 계좌를 중심으로 출금 한도를 제한하고 실제 영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점검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장기간 거래가 없거나 사업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계좌를 선별해 통제하고 정상 영업이 확인될 경우 제한을 해제하는 방식입니다. 금융사기 연관 가능성이 높은 법인에 대해서는 별도 관리 체계를 적용해 집중 점검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중은행들도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한도제한계좌 적용 범위를 확대하거나 인공지능(AI) 기반 모니터링과 현장 실사를 결합해 계좌 개설부터 거래 단계 등 전 단계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은 법인계좌 개설 시 사업 실체를 확인하는 현장 조사와 내부 평가 제도를 연계하고 있습니다. 하나은행은 업종·자본금·대표자 특성 등을 반영한 심층 분석을 병행하고 있으며, NH농협은행은 법인계좌 신규 개설 시 현장 실사를 의무화하고 월 단위 점검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KB국민은행의 경우 AI 기반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거래 패턴과 자금 흐름을 실시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은행권이 대포통장 및 이상거래 차단 강화에 나선 것은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이 다수 계좌를 활용한 분산 이체, 정상 거래 위장 등으로 탐지를 회피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자금이 수십 차례로 나뉘어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기존 시스템이 이를 포착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탐지 중심 대응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분석입니다.
 
사법부 판단도 금융사 책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지난달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은 한 고객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은행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는데요. 해당 사건에서 피해자는 수차례에 걸쳐 거액을 분할 송금하는 과정에서 이상거래 정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에도 금융사가 지급정지나 추가 확인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금융사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이상거래 탐지 기준과 모니터링 체계를 충분히 작동시키지 못했거나 설령 기준이 존재하더라도 실제 거래 상황에서 이를 적절히 적용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으며 피해 의심 거래로 볼 수 있는 정황이 있었음에도 임시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문제로 보고 전체 손해액의 30%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금융사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더라도 내부통제와 이상거래 대응이 미흡할 경우 책임이 발생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한 판결로 평가됩니다.
 
금융당국과 정치권에서도 보이스피싱 관련 금융사 책임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을 중심으로 보이스피싱 피해 배상 체계 개편 논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개정안은 보이스피싱 발생 시 피해자와 범죄자가 이용한 금융회사가 각각 피해액의 50%를 분담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해 사건당 보상 한도는 5000만원으로 설정되며 피해자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배상 책임이 면제됩니다.
 
보이스피싱 대응, 은행별 전략 비교.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배상 의무화 시행시 비용 부담 우려"
 
금융당국은 현재 보이스피싱은 개인 주의만으로 예방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금융사에 일정 수준의 책임을 부여해 예방 투자와 관리 유인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이 국회에 제출한 추계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약 85%가 5000만원 이하 피해 구간에 해당합니다. 해당 기준을 적용할 경우 금융권이 부담해야 할 연간 배상 규모는 약 2811억원으로 추산되는데 사실상 대부분의 피해가 보상 범위에 포함되는 구조로 제도 도입 시 비용 부담이 상시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입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배상 책임이 현실화되면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문제가 될 수 있는 계좌를 미리 걸러내고 거래를 선제적으로 통제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사전 통제 강화에 따른 부작용도 제기됩니다. 정상 기업의 자금 집행이 지연되거나 거래 제한으로 영업 활동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고 고령층 등 금융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이 저하될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상 한도와 면책 요건과 허위 신고 방지 장치 등 세부 설계에 따라 제도의 실효성과 시장 영향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며 "통신사 등과의 책임 분담 구조가 어떻게 정리되느냐도 중요한 변수"라고 말했습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과실 배상제가 도입되면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반대로 금융사가 대부분의 책임을 지게 되는 구조가 되면 피해자나 범죄자 모두 책임 인식이 약해질 가능성도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보이스피싱 범죄 유인이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존재한다"고 밝혔습니다.
 
시중은행 창구에서 고객이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지유 기자 emailgpt12@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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