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수정 기자]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이 의료비 부담 경감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손해율 관리 중심의 금융 논리에 따라 의료비 보장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공공성 회복에 초점을 맞춰 복지 관점의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자기부담금 늘리고 보장 줄여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실손보험은 지난 1999년 최초 판매 이후 1세대부터 5세대까지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의료비 부담 경감이라는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실손보험이 세대를 거치면서 자기부담금을 높이고 보장을 줄이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요. 단기적으로는 소액이나 경증 의료 이용은 줄이는 효과를 보더라도 의료기관이 수익 유지를 위해 다른 비급여 항목을 늘리거나 과잉 진료를 유도하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손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의료비 부담을 덜기 위해 도입된 상품입니다. 질병이나 상해 치료 과정에서 가입자가 병·의원과 약국에 지출한 의료비·약제비를 보상해 의료비로 인한 가계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 본래 취지였습니다.
1999년 9월 최초 판매 이후 가입자는 빠르게 늘면서 현재는 국민 약 4000만명이 가입한 대표 민영보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 의료기관의 과잉 진료, 보험사의 손해율 악화 등이 맞물리면서 제도 운영의 초점은 소비자 보호보다 수지 관리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실제 실손보험 개편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가입자 부담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1세대는 의료비 전액 보장형이 주를 이뤘지만, 2009년 출시된 2세대부터 급여·비급여의 자기부담금(10~20%)이 도입됐습니다. 2017년 3세대에서는 일부 비급여 보장이 축소되고 비급여의 자기부담금도 20~30%로 상향됐습니다.
2021년 4세대는 비급여를 특약으로 분리하고 이용량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부과하는 구조를 도입했습니다. 급여 20%, 비급여 30%로 최고 수준의 자기부담금 비중도 고정됐습니다. 출시를 앞둔 5세대 역시 보험료 부담은 낮추되 비급여 항목을 중증·비중증으로 세분화해 보장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토되고 있습니다.
김경선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말 '공·사 건강보험 상생을 위한 정책과제' 세미나에서 "의료인의 유인 수요 등 시장 행태 변화 없이 구조 개편만으로 비용 절감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정부의 5세대 실손보험 비급여 관리 대책과 관련해 "관리 급여나 병행 진료 제한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비급여 진료가 늘어나는 풍선효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해외선 가격 통제·표준화에 초점
해외 국가들은 민영 건강보험을 운영하더라도 우리나라처럼 가입자의 자기부담금을 높여 의료 이용을 억제하는 방식보다 의료비 가격 통제와 상품 표준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비용 부담을 전가해 수요를 줄이기보다 의료 공급 구조를 관리해 전체 의료비 증가를 억제하는 접근입니다.
독일의 민영 건강보험(PKV)은 공보험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형태로 운영되지만 보험사가 임의로 보장 범위를 축소하거나 계약 조건을 수시로 변경하기 어렵도록 강한 규제를 받습니다. 보험료 산정 역시 엄격한 감독 아래 이뤄지며, 장기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적립 구조를 갖추고 있어 단기 손해율 악화를 이유로 소비자 부담을 급격히 늘리기 어렵습니다.
프랑스의 보완적 건강보험(Mutuelles)은 공적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본인부담금을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료진이 법정 수가를 초과해 청구하는 비용에 대해서도 정부가 일정한 가이드라인과 상한선을 두고 관리합니다. 비급여 성격의 진료비마저 시장 자율에만 맡기지 않는 구조입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민간 보험사가 기본 건강보험을 운영하지만 보장 범위와 상품 구조는 국가가 표준화하고, 보험사는 가격과 서비스 경쟁에 집중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민간 보험이 존재하더라도 공공의료 체계의 보조 장치로 기능하도록 제도를 설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금융위원회 주도로 의료계·소비자·학계·금융권·보건당국 등이 참여하는 '의료개혁 특별위원회'를 통해 실손보험 개편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유사한 협의 구조를 갖추고도 해외가 공급자 규율과 제도 안정성 강화에 방점을 두는 반면, 국내는 가입자 부담 조정에 무게가 실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공적기관 심사 연계로 지급기준 통일해야"
전문가들은 실손보험이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입자 부담 확대보다 공적관리 체계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대표적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의 심사 역량을 활용해 민간 실손보험 청구·지급 심사를 연계하는 방안이 거론됩니다.
현재는 보험사별 자체 심사 기준과 외부 위탁 심사가 혼재돼 지급 기준의 일관성이 떨어지고 소비자 분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공적 전문 기관 중심으로 심사 체계를 정비하면 과잉 청구와 부당 지급을 줄이는 동시에 소비자 예측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비급여와 급여를 결합해 과잉 진료를 유도하는 '혼합 진료' 관행 역시 손봐야 할 과제로 지목됩니다.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한 급여 진료 과정에서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를 끼워 파는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면 병원의 비급여 의존 수익 구조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도 비급여 항목 표준화와 가격 공시 확대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습니다. 어떤 진료가 왜 비급여인지, 의료기관별 가격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 투명하게 공개돼야 소비자 선택권과 시장 경쟁이 정상화될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보장 축소만 반복하면 국민 불만과 민원만 커질 수밖에 없다"며 "금융상품이 아닌 의료비 안전망이라는 관점에서 제도를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시내 국민건강보험공단 민원실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신수정 기자 newcrystal@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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