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유 기자] 금융감독원이 계좌 지급정지 제도를 악용한 이른바 '통장 묶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선책을 내놓은 지 5개월이 지났지만,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좌 지급정지 이의제기 절차를 간소화하고 심사 기간을 단축하기로 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입금받은 뒤 계좌가 정지됐다는 국민청원이 제기되는가 하면 허위 보이스피싱 신고를 빌미로 금전을 갈취당했다는 제보도 잇따르고 있는데요. 개선책이 실제 피해 구제로 이어지는지 실효성을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개선책에도 악용 피해 여전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은 지난 5월 보이스피싱과 무관한 계좌가 더 쉽고 빠르게 지급정지에서 해제될 수 있도록 은행의 업무처리 절차를 개선한다고 밝혔습니다. 지급정지 계좌 명의인이 소명자료를 충분히 제출하면 원칙적으로 5영업일 안에 이의제기 심사 결과를 통보하도록 했는데요. 주요 이의제기 유형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공통 소명자료만 제출하도록 하고,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절차도 간소화하기로 했습니다.
계좌에 입금된 금액이 소액이고 과거 지급정지 이력이 없으며, 나머지 입출금 내역이 생계와 관련된 것으로 명확한 경우 등이 대상입니다. 이의제기가 접수되면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계좌에 대해서는 문제가 된 입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우선 지급정지를 해제하도록 했습니다. 금감원은 은행권부터 개선안을 시행한 뒤 다른 금융권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개선책 발표 이후에도 계좌 지급정지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국민청원에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38만원을 입금받은 뒤 계좌가 정지됐다는 취지의 글이 올라왔는데요. 청원인은 경찰에 자진 출석해 범죄와 관련이 없다는 확인서까지 받았지만 계좌 지급정지가 해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좌를 사용할 수 없어 차량에 주유조차 하지 못하고 현금으로 생활해야 했다는 설명입니다.
계좌 지급정지를 빌미로 금전을 갈취당했다는 제보도 나왔습니다. 한 제보자는 어머니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해 돈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고, 안내받은 계좌로 30만원을 돌려보낸 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라고 허위 신고를 당했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상대방이 계좌 지급정지를 빌미로 합의금을 요구했고, 어머니가 현금 300만원을 건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보자에 따르면 어머니는 사기에 연루됐다는 말에 겁을 먹어 은행 등에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으며, 뒤늦게 상대방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이른바 '통장 묶기'는 타인 계좌에 돈을 입금한 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라고 신고해 해당 계좌의 지급정지를 유도하는 수법입니다. 이후 계좌 명의자에게 지급정지 해제를 빌미로 금전을 요구하는 협악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의 인출을 막기 위한 지급정지 제도가 악용되면 범죄와 무관한 계좌 명의자까지 금융거래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지급정지 제도를 악용해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 146명에게서 23억2000만원을 뜯어낸 일당이 적발된 사례도 있는데요. 이들은 계좌에 돈을 입금한 뒤 지급정지를 유도하고 이를 빌미로 금전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사 과정에서는 현직 은행원 2명도 가담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사진=뉴시스)
은행 내부 절차 개선 필요
금감원 개선책 발표 이후에도 피해 호소가 이어지면서 이의제기 절차 개선이 실제 계좌 회복과 피해 구제로 이어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전문가들은 통장 묶기 피해를 줄이려면 은행의 지급정지 해제 절차를 개선하는 동시에 신속한 피해자 확인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정부와 은행이 비용을 분담하고 내부 처리 절차를 간소화해 피해 구제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다양해지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한 시스템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면서 "금융감독원이 개선 방안을 발표하더라도 실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은 은행인 만큼 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정 교수는 "통장 묶기 피해로 지급정지된 계좌를 해제하려면 은행이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고 관련 부서의 검토와 의사결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부서가 연결돼 있거나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을 자체 운영하지 않고 외부 시스템을 이용하는 경우 처리 시간이 길어질 수 있어 은행별로 지급정지 해제 과정과 관련 부서의 업무 흐름을 살펴보고, 불필요하게 시간이 지연되는 부분이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통장 묶기 피해를 줄이려면 계좌 지급정지 해제 절차를 단순히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은행 입장에서는 계좌 명의자가 실제 피해자인지, 범죄자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데다 섣불리 지급정지를 해제했다가 범죄 조직에 돈을 내주면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결국 은행이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피해자 여부를 확인하고 지급정지를 신속하게 해제하려면 인력을 늘리고 고객과 직접 통화하는 등 개별적인 확인 절차를 강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기에 은행에 무조건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기보다 정부와 은행이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지부터 논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피해자 확인과 신속한 구제 절차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 시내 한 건물에 설치된 시중 은행 현금 자동 입출금기 모습. (사진=뉴시스)
이지유 기자 emailgpt12@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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