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아침,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을 천천히 훑어 내려가다가 한참 동안 시선이 멈춘 이름이 있었다. '김덕린(金德麟)'. 대중에게는 '김염(金焰)'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1930년대 중국 영화계를 호령했던 '영화 황제(映帝)'가 마침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애족장)로 서훈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묵직한 울림이 밀려왔다.
몇 년전, 드라마를 제작하는 후배가 '김염'이라는 낯선 인물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중국에서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고 상하이미디어그룹 영화박물관의 영화인 인명사전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한국인. 독립운동가 김염.
바로 그였다.
은막 위의 화려한 스타덤과 '영화 황제'라는 칭호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인간의 고독하고도 치열했던 항일의 길. 문화콘텐츠 기획을 하며 살아온 나에게 그의 삶은 단순한 한 편의 역사를 넘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과 예술가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명문의 혈맥, 가슴속에 새겨진 민족의 묵향
김염 선생의 본명은 김덕린이다. 그의 족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걸어간 삶의 궤적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필순, 항일 여성 운동의 상징인 사촌 김마리아, 근우회를 창립하며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고모 김필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지낸 고모부 우사(尤史) 김규식까지.
그야말로 가문 전체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커다란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삼엄했던 시대, 어린 김염의 가슴속에는 일찍부터 독립을 향한 염원과 민족적 의기가 먹물처럼 깊게 스며들었을 것이다.
신민회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넘어간 아버지 김필순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김염은 아버지 사후 1924년경 상해로 건너가 고모부 김규식 선생이 운영하던 남화학원(南華學院)에 입학한다.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 등 당대 민족의 선각자들이 숨 쉬던 남화학원의 교정에서 청년 김염은 민족주의 사상과 시대적 소명의식을 철저히 체화했다.
가문의 숭고한 정신은 그에게 유산이었으나, 동시에 일제의 감시 속에서 평생을 지고 가야 할 묵직한 시대적 부채이기도 했을 터다.
2. 은막(銀幕)이라는 전장, 카메라는 그의 총칼이었다
1920년대 후반 중국 영화계에 등장한 김염은 섬세한 연기력과 기품 있는 자태로 신화적인 인기를 얻었다. 중국 대중과 언론은 그에게 '영화 황제'라는 전무후무한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나 그는 부와 명예라는 화려한 조명 뒤로 스며드는 시대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았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전체가 일제의 광기 어린 침략 전쟁으로 물들어가던 1930년대, 김염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바로 '스크린'이었다. 그는 순애보나 단순한 흥행작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일제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청년들의 각성과 자유, 평화의 열망을 담아낸 항일 영화의 주연을 자처하며 40여편의 항일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가 연기한 스크린 속 한 장면 한 장면은 절망에 빠진 한·중 양국의 민중들에게 "우리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강렬한 메시지이자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에게 '영화 황제'라는 타이틀은 대중의 환호가 만든 왕관이 아니라, 압제받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항일의 지조를 지켜내야만 했던 숭고하고도 외로운 소명이었던 셈이다.
3. 은막 뒤에서의 비밀스러운 투쟁
진정한 거장의 위대함은 조명이 꺼진 뒤의 삶에서 드러난다. 김염 선생의 항일은 스크린 위에서의 연기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배우로서 누린 부와 대중적 영향력을 위험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데 바쳤다.
상해 밀정들과 일제 경찰의 눈이 핏발을 세우던 시절, 배우라는 독특한 신분이 주는 사각지대를 활용하여 임정 요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대는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일제의 갖은 회유와 공작, 협박 속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친일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가문의 자존심과 예술가의 양심을 지켜냈다.
은막 위에서는 수억 대중의 사랑을 받는 화려한 황제였으나, 현실에서는 임시정부의 든든하고 은밀한 조력자로서 절절한 항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4. 오늘, 우리가 김염이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이유
이번 제81주년 광복절 포상은 뒤늦게나마 그의 불꽃같은 삶을 정당하게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김염 선생은 중국 영화사에서는 기틀을 다진 문화적 영웅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는 대중예술을 항일 투쟁의 강력한 수단으로 승화시킨 귀중한 유공자로 새로이 각인되었다.
독립운동은 총칼을 들고 전선에 나서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뛰어난 역량과 매체를 통해 민족의 존엄과 자유를 증명해 내는 것 역시 위대한 독립운동이다.
김염 선생의 삶은 대중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시대의 아픔과 호흡하고 민족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오늘날, 화려한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김염 선생의 서훈 소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 문화 창작자들에게 나지막하지만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쥐고 있는 펜과 카메라, 그리고 예술은 지금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은막 속에 불꽃같은 민족혼을 새겨 넣었던 '영화 황제' 김염. 80여 년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그의 이름 석 자 앞에서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가 남긴 숭고한 유산을 다시금 마음 깊이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