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기 위한 선택을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향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스위스다. 많은 한국인들은 스위스를 ‘안락사가 허용된 나라’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스위스가 허용하는 것은 의사가 직접 생명을 종결하는 적극적 안락사가 아니라 일정한 조건 아래 본인이 최종 선택을 하는 조력사망 제도에 가깝다. 그럼에도 스위스는 세계적으로 존엄한 죽음과 자기결정권 논의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뉴욕에 사는 한 지인은 오래전부터 존엄사와 조력사망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는 스위스의 조력사망 제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인터뷰를 접한 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상당한 비용을 내고 해외 조력사망 단체에 가입했으며 관련 서류에도 서명했다. 당시 그는 아직 미혼의 40대였고 특별한 질병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입한 이유는 자녀 계획이 없고 외아들로 살아왔는데 언젠가 모친이 세상을 떠나시면 혼자 남게 될 테니 자신의 마지막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별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공감이 되는 부분은 “이제는 안심이 된다.”였다. 그에게 조력사망 단체 가입은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자신의 삶을 끝까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전장치였지 싶다. 지인이 조력사망 신청서에 서명까지 마쳤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으로 들렸지만 비슷한 생각을 한 한국인들이 그만은 아니었다.
2019년 스위스 디그니타스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두 명이 각각 2016년과 2018년에 스위스에서 조력사망을 선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서울신문이 2023년 진행한 장기 취재에서는 2016년 이후 스위스에서 조력사망을 선택한 한국인이 최소 10명이며, 관련 단체에 가입한 한국인은 약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했다. 물론 가입자 모두가 실제 조력사망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 많은 중장년층은 죽음 그 자체보다 노년의 의존을 더 두려워한다. 치매와 중증 질환, 장기 간병, 경제적 부담, 가족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스위스를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도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위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스위스를 바라보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안락사 찬반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노년의 삶과 죽음을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가 경제적 부담이나 외로움, 돌봄의 부재 때문에 죽음을 고민하게 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스위스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단순히 죽음을 선택할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음보다 의존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락사 논쟁은 죽음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충분히 돌보고 있는가. 우리는 노인이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가족의 간병 부담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스위스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존재는 단순한 해외 뉴스가 아니다. 그것은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 한국이 마주한 현실의 한 단면이다.
안락사 시리즈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스위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죽음에 대한 열망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짐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