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 거버넌스 6일 전

성공의 탈을 쓴 종속: 이창동의 베니스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이 한국영화 자본과 정책에 던진 묵직한 경고

1. 베니스 은사자상 쾌거, 그러나 웃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을 품에 안았습니다. 2002년 《오아시스》로 감독상을 받은 지 24년 만이자,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의 베니스 심사위원대상 수상이라는 대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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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축포가 터져야 할 한국 영화계의 표정은 복잡하고 서늘합니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가 전액 투자·제작한 이 작품의 눈부신 쾌거 이면에는, 한국 상업영화 투자 시스템과 공공 지원 제도의 처참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창동의 베니스 수상은 단순한 훈장이 아닙니다. 거장의 세계관이 글로벌 영화계에서 여전히 강력한 타당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노동과 관계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영화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의 수상 소감처럼, 이창동은 영화를 일회성 도파민 소비재가 아닌 ‘인간과 시대를 향한 지독한 질문의 장’으로 재정의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마주해야 합니다. 왜 한국 영화의 진정한 예술적 성취를 이끌어낸 주체가 국내 대형 투자배급사(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등)가 아닌, 외국계 스트리밍 공룡 넷플릭스였는가?

2. 60억 중예산 영화도 거절한 대기업, 무기력한 영진위 매칭 펀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능한 사랑》은 순제작비 60억~80억 원 안팎의 중예산 영화입니다. 수백억 원이 투입되는 상업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무모할 정도로 거대한 액수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영화진흥위원회의 '중예산 한국영화 제작 지원' 대상작으로 선정되어 국비 15억 원의 지원금도 확보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나머지 제작비를 채우기 위해 CJ, 롯데 등 국내 대기업 투자사들의 문을 두드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전면 '거절'이었습니다. 손익분기점(BEP) 달성이 불확실하고 메시지가 무겁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영화 공공 지원 시스템의 치명적 한계가 드러납니다. 영진위 지원금은 민간 자본 유치를 전제로 하는 '매칭 펀드' 방식입니다. 아무리 공공기관이 뛰어난 작품이라 인정하고 지원금을 배정해도, 민간 투자사가 외면하면 그 지원금조차 그림의 떡이 됩니다.

결국 민간 유치 실패로 매칭 요건을 맞추지 못한 이창동 감독 측은 확정되었던 15억 원의 국비 지원금을 자진 반납해야 했습니다. 공공 자본마저 민간 자본의 셈법에 종속되어 정작 '창작적 위험'을 분산해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실을 보여준 셈입니다. 이 벼랑 끝에서 제작비 전액을 쥐고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 바로 넷플릭스였습니다.

3. '케데헌' 사태와 거장 홀대: 계산기만 두드리는 자본의 경직성

사실 이러한 자본의 ‘거장 홀대’는 하루이틀 일이 아닙니다. 이 감독은 《시》(제작비 약 35억 원)와 《버닝》(약 80억 원) 당시에도 번번이 펀딩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술적·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작품은 늘 상업 자본 시스템에서 외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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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를 포기하고 계산기만 두드리는 자본의 경직성은 비단 작가주의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사상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서며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K-POP: 데몬 헌터스》의 잔혹사 역시 똑같습니다.

K-팝과 무속신앙을 결합한 이 작품은 기획 단계에서 "소재가 너무 낯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국내 배급·투자사들에게 철저히 기각당했습니다. 위험 요소로 분류된 이 기획을 집어 든 것 역시 넷플릭스였고, 결과는 전 세계 톱10 장기 집권이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극장 개봉 매출에만 목을 매는 국내 투자사들과 달리, 넷플릭스는 190여 개국 동시 유통망을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이들에게 이창동 같은 거장의 작품이나 《K-POP: 데몬 헌터스》 같은 독창적 기획은 단순 흥행을 넘어 플랫폼 전체의 '브랜드 품격'을 끌어올리고 글로벌 라이브러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대체 불가능한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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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투자사들과 공공 지원 시스템이 '위험한 모험'이라며 내다 버린 돌멩이가 넷플릭스의 왕관에 박히는 보석이 되는 역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4. 성공의 탈을 쓴 종속: 주체적 기반을 잃어가는 한국 영화

그러나 거장의 베니스 수상 뒤에 숨은 이 역설을 결코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글로벌 OTT 자본에 철저히 잠식당해 가는 사이, 한국의 영화 및 영상 산업은 스스로 서야 할 주체적 기반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IP(지식재산권) 및 유통 주권 상실: 거장의 신작조차 해외 플랫폼의 간택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구조는 '성공'이 아니라 '종속'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청 기지화의 위험: 극장이라는 전통적 유통 생태계가 해체되고 플랫폼의 알고리즘과 글로벌 취향에 창작의 기획이 종속되는 순간, K-콘텐츠의 화려한 외형은 거대 OTT의 기획·생산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창동감독의 베니스 은사자상은 K-콘텐츠의 화려한 위상 뒤에 숨겨진 한국 영화 생태계의 서글픈 초상이이자 엄중한 경고입니다. 안전한 선택만 고집하는 상업 자본과, 민간의 눈치만 보며 제대로 된 안전망 역할을 못 하는 공공 지원 시스템의 방기가 거장을 해외 자본으로 등 떠밀었습니다.

에필로그: 자본과 정책 당국이 대답해야 할 시간

이번 사례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한국의 대기업 투자배급사는 시장 지배적 지위에 걸맞은 산업적·문화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안전한 흥행 공식에 안주하며 주체적 창작 자산과 산업 주권을 해외 자본에 통째로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작적 위험을 함께 짊어질 전향적인 민간 투자와 공공 지원 체계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한국 영화 산업의 자생력은 영영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에서 던진 서늘한 질문에, 이제 사유를 멈춘 한국의 영화 자본과 정책 당국이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 포스팅은 인터넷매체 더브리프뉴스(https://www.thebriefai.kr/news/articleView.html?idxno=13538)에 기고 후 블로그에 재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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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마토 P · 6일 전

한줄 한줄 꼼꼼하게 읽어보고 생각도 많아집니다. 저도 영화는 아니지만 나름 예술방향쪽 일을 하다 온사람이라 이런 축하해야할 소식 뒤 바로 따라오는 씁쓸함에 많이 서글픈 마음이네요

호정 G · 6일 전

한국영화계가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지만 정책 담당자들은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 볼 의지가 없이 대기업 의존도를 더 심화시키고 있고, 윤석열 같은 경우, 넷플릭스를 투자자라고 착각하고 응원해서 비웃었는데, 이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은 그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무기력한 정책자들입니다. 정부 지원자금 규모면 바꿀 수 있는 구조인데도.. 그냘 손놓는 정도가 아니라 정부자금으로 대기업 위주로 판을 짜고 싶어해요ㅣ

호정 G · 6일 전

이 글을 본 영화계 후배가 ‘미국자본은 작가를 알아보는 눈이라도 있죠’라고 답하더군요 ㅠ

재재파더 G · 6일 전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영화업계가 침체기를 겪다가 최근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