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고미 거버넌스 6일 전

이창동 감독은 늘 주변부를 바라본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오아시스》로 베네치아 감독상을 받은 지 24년 만의 수상이다. 수상 직후 이창동 감독은 노동이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져 가는 시대에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짧은 소감이었지만, 이 말은 이창동이라는 감독을 이해하는 데 꽤 정확한 문장이 아닐까 한다. 그는 늘 영화가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보다,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온 감독이라고 본다.

이창동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출발점이 1980년대 민주화 세대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는 그 시대의 흔적이 있다. 특히 《박하사탕》은 한 개인의 삶을 거꾸로 되짚으며 국가폭력과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창동의 영화 전체를 1980년대의 경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그 시대를 청년기로 보낸 문화인들에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쩌면 일종의 기본값이었다. 이창동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 이후에도 쭉 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소설가 출신인 그가 꾸준히 바라본 것은 거대한 역사보다 그 역사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얼굴이다. 《오아시스》에서는 장애인 여성과 전과자가 주인공이고, 《밀양》에서는 자식을 잃은 한 여성이 중심에 놓인다. 《시》의 주인공 역시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평범한 여성이다. 이들은 시대나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도 아니라 그저 우리 주변에 있지만 좀처럼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창동은 그들을 중심으로 끌어오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모양을 다르게 보이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가주의를 사회비판이라고만 부르기는 좀 아쉽다. 그는 사회의 모순을 설명하기보다 그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여준다. 사회가 만들어낸 상처를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데 이것은 상당히 실천적인 태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잘못으로 인해 누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밀양》은 그 점에서 특별하다. 기독교계에서 이 영화가 참회와 용서,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밀양》은 신앙을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종교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신애는 아들을 잃은 뒤 신앙을 통해 용서에 다가가려 하지만, 정작 가해자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믿음은 무너진다. 용서는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가해자가 먼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창동은 답하지 않고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을 관객 앞에 그대로 남겨둔다.

《버닝》에 이르면, 이창동 영화의 ‘불편한 변종’처럼 느꼈다. 주인공 종수는 분명 주변부에 있는 청년이고, 벤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인물이다. 계층의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해미의 실종도, 벤의 정체도, 종수가 느끼는 분노의 실체도 끝내 명확해지지 않는다. 관객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종수의 의심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전의 이창동 영화에서 인물의 상처를 바라보며 느꼈던 연민마저 흔들린다.

어쩌면 이것은 이창동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사회가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변부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쉽게 구분할 수 없고, 계층의 벽은 눈에 보이면서도 증명하기 어려운 시대다. 《버닝》의 불편함은 그래서 이창동의 작가주의가 실패한 흔적이 아니라, 그 작가주의가 새로운 현실을 만났을 때 나타난 왜곡된 렌즈처럼 보인다.

이번 수상작《가능한 사랑》은 다시 해고 노동자와 같은 주변부의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함께 등장한다. 여기서 질문은 한 단계 더 복잡해진다. 고통받는 사람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그 영화 속 감독이 이해하고 벌이는 일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단지 예술의 소재로 삼아 소비하려 벌이는 관찰일까. 누군가를 대신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이창동 자신에게 돌아간다. 그는 오랫동안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영화의 중심에 세워왔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통을 영화로 만드는 자신 역시 그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아닌까 한다. 《가능한 사랑》은 바로 그 지점까지 자신의 작가주의를 밀어붙이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아 수상을 한 것 아닐까 짐작해본다.

돌이켜보면 이창동의 출발점에는 1980년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1980년대를 반복해서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 시대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사람을 찾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회의 중심에서 세상을 설명하기보다 주변부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아닐까.

이창동의 많은 영화들는 편하지가 않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여주고,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때로는 《버닝》처럼 그 질문의 답은커녕 질문 자체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다. 그가 다시 카메라로 담고자 한 것은 노동이 사라지고 관계가 끊어지는 시대에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다. 이창동의 작가주의란 바로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작가로 남고자 함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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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8:50 AI가 답글·인용·좋아요 반영해 점수 재판단

댓글 2
성하기 G · 6일 전

버닝의 감독이 이창동이군요

전문가 P · 6일 전

박하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