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패권 경쟁은 더 이상 어느 기업이 더 좋은 반도체나 인공지능을 개발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생산 현장과 시장, 국방과 기반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지가 승패를 가른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 공공조달과 금융, 규제와 수출통제가 하나의 목표 아래 움직여야 한다. 과학기술의 주도권 자체가 국가안보 목표가 되고,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과 연구기관뿐 아니라 이를 지원하고 구매하며 보호하는 국가 시스템 전체가 경쟁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에 위치한 인텔의 신규 반도체 공장 '팹 52' 전경. 미국 내 최첨단 로직 반도체를 생산하는 시설로, 인텔이 추진 중인 1000억달러 이상의 미국 내 투자 계획에 포함됐다. (사진=인텔)
기술국가주의를 떠받치는 네 기둥
미국이 제시한 기술 체계는 집중, 회복력, 기민성, 보호라는 네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집중은 모든 기술에서 1등을 추구하기보다 미국이 강점을 지닌 분야로 경쟁을 끌어오는 것이다. 해저와 우주, 인공지능과 자율기술을 중심으로 첨단 제조·소재와 반도체, 원자력, 미래 컴퓨팅, 극초음속, 통신과 사이버보안 등에 재원을 집중한다.
회복력은 특정 국가와 기업, 지역에 대한 의존을 줄여 공격이나 재난이 발생해도 핵심 기능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기민성은 연구개발과 계약·실증 절차를 단축하고 빠른 실패와 전환을 허용하는 것이며, 보호는 연구보안과 투자심사, 수출통제로 기술이 경쟁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네 축은 별개의 정책이 아니라 기술의 개발부터 생산·도입·보호까지 잇는 하나의 체계다.
승부의 규칙부터 바꾼다
집중에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미국은 잠재적 적대국이 강점을 가진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고, 미국이 비용과 기술 측면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경쟁구도를 만들려 한다.
경쟁국이 값싼 드론과 미사일을 대량으로 배치한다고 해서 같은 장비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정교한 타격체계와 저비용·소모형 플랫폼을 결합해 대응하고, 경쟁국이 값비싼 방어망에 더 많은 자원을 쓰도록 유도하려 한다. 반대로 고가의 첨단 무기만으로 값싼 공격수단에 대응해 미국이 먼저 재정적 부담을 떠안는 경쟁도 피한다.
기술 개발의 목적은 더 뛰어난 무기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대의 비용을 높이고 공격 역량에 사용할 자원을 방어로 돌리게 하는 것도 경쟁의 일부다. 미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상대의 투자와 자원 배분까지 바꾸겠다는 것이다.
기술표준과 국제규범도 경쟁의 경기장을 정하는 수단이다. 미국 기술에 유리한 기준이 국제표준이 되면 미국 기업은 시장을 선점하고 경쟁국 기업에는 새로운 비용을 부과할 수 있다. 기술패권은 연구실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칙과 표준이 세계시장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무너지지 않는 국가를 설계한다
회복력은 공급처를 여러 곳으로 늘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은 공간과 시간, 기술의 세 차원에서 국가 기능을 분산하려 한다.
생산시설을 여러 지역에 배치하고 위기 이후 투입할 예비시설과 물자를 확보하며, 동일한 취약성을 공유하지 않는 여러 기술로 기능을 분산하는 방식이다. 목표는 어떤 공격에도 피해를 보지 않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일부가 손상돼도 전체 체계가 한꺼번에 붕괴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성능을 낮추며 버티는 구조다.
핵심 광물과 반도체, 통신장비와 에너지 부품의 공급망도 같은 관점에서 다뤄진다. 국내 생산을 우선하고, 국내 공급이 부족할 때만 신뢰할 수 있는 협력국의 공급업체를 활용한다. 대체 소재와 부품을 개발하고 디지털 기술로 공급망의 출처를 추적하는 연구도 확대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양자기술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국가안보의 판도를 바꿀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선점하려 한다. 경쟁국의 돌파구에 기습당하지 않도록 연구와 인력을 미리 확보하는 것도 회복력의 일부다.
연구실의 기술을 공장과 전장으로
기민성의 핵심은 기술을 빠르게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역량으로 전환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연구개발의 전 과정에 관여한다. 기초연구와 상업적 수익이 불확실한 분야에는 정부가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하고, 초기·중기 기술은 민관 협력으로 개발한다. 기술이 성숙한 후기 단계에서는 정부가 직접 고객이 돼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한다.
공공조달로 최초 시장을 만들고 연방 연구시설과 시험·평가 장비를 기업에 개방한다. 정부가 모든 자금을 직접 공급하기보다 초기 위험을 분담하고, 기술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민간자본을 끌어들인다. 연구개발과 전략적 투자, 공공조달을 연결해 기술이 연구실에 머물지 않고 생산으로 넘어가도록 하는 구조다.
인력 정책도 국가안보의 일부로 다뤄진다. 학교와 대학에서는 인공지능과 양자, 우주기술 교육을 강화하고, 반도체와 첨단 원자로 건설·운영 등에 필요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도제와 인턴십, 자격체계를 확대한다. 기술패권에는 최고 수준의 과학자뿐 아니라 공장을 건설하고 장비를 운용하며 제품을 대량생산할 숙련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혁신은 열고 기술은 잠근다
미국은 개방적인 연구와 투자 환경을 유지하면서도 그 혜택이 경쟁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막으려 한다. 정부 지원 연구에 참여하는 개인과 기관을 추적하고 고위험 주체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제한하며, 연구기관의 보안 심사를 강화한다.
대미외국인투자위원회의 심사 범위를 넓혀 첨단 기술과 공급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국인 투자를 감시한다. 인공지능과 양자, 반도체와 슈퍼컴퓨터 등 전략 분야에서 미국의 자금과 경영 노하우가 경쟁국의 군사·정보 역량을 키우지 못하도록 미국 자본의 해외투자도 제한한다.
수출통제는 기술 유출 방지책을 넘어 세계의 기술 지형을 설계하는 수단이 됐다. 어느 국가가 첨단 기술을 이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을 키울 수 있는지를 미국이 결정하려 한다. 유전체와 위치, 생체·건강·금융정보 같은 데이터도 인공지능 훈련이나 적대적 활동에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보호한다.
다만 모든 국가에 같은 장벽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적대국과 거리를 두고 강력한 연구보안과 수출통제 체계를 유지하는 동맹국에는 기술과 무기 수출 절차를 간소화한다. 개방과 차단의 기준이 미국의 국가안보 목표에 얼마나 정렬돼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기술동맹의 두 얼굴, 협력과 통제
미국이 원하는 것은 혼자 모든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아니다. 핵심 기술과 생산 기반, 표준과 금융은 미국이 통제하되 부족한 부분은 동맹국과 협력국의 역량으로 채우는 체제다.
동맹국의 인공지능과 원자력, 양자와 첨단통신, 우주 기술은 미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력 승수'로 활용된다. 대신 연구보안과 투자심사, 공급망 관리와 수출통제에서는 미국과 같은 기준을 따라야 한다. 기술협력과 기술통제가 함께 움직이는 미국 중심의 기술국가주의 블록이다.
경쟁과 전쟁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다. 공급망을 차단하고 반도체 장비의 수출을 제한하며 상대국의 연구와 투자를 막는 행위는 총을 쏘지 않는 전쟁에 가깝다. 첨단 기술이 군사력에 직접 적용될수록 이러한 경쟁은 더욱 상시화할 수밖에 없다.
한국도 기업의 연구개발과 시장 판단에만 대응을 맡겨둘 수 없다. 산업정책과 통상, 연구개발과 정책금융, 인력 양성과 안보정책을 하나의 목표 아래 연결해야 한다. 어떤 기술을 국내에 남기고 어느 분야에서 미국과 공동 개발할지, 정책금융은 어떤 위험을 부담하고 정부 조달은 어떤 시장을 만들지 선택해야 한다. 기술패권 시대에 경쟁하는 단위는 기업 하나가 아니라 기업을 뒷받침하고 시장을 만드는 국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