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디지털자산 전문 매체 <디지털애셋>에서 작성했습니다.
[디지털애셋 박재연 기자] 가상자산(디지털자산)을 스마트계약에 예치하면 정해진 전략에 따라 여러 온체인 시장에 배분해 수익을 창출하는 ‘온체인 볼트(Vault)’ 시장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볼트는 쉽게 말해 디지털자산을 넣어두는 '자동 운용 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자가 자산을 예치하면 스마트 계약이 이를 대출 시장이나 스테이킹, 실물연계자산(RWA) 시장 등에 배분하고 발생한 수익을 돌려주는 구조입니다.
최근에는 단순히 미리 설정된 규칙에 따라 자금을 자동 배분하는 데서 나아가 전문 운용자인 '큐레이터(Curator)'가 투자처와 자금 배분 비중을 결정하고 위험과 유동성까지 관리하는 형태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블록체인 위에 전통 금융의 자산운용과 비슷한 기능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상자산(디지털자산)을 스마트 계약에 예치하면 정해진 전략에 따라 여러 온체인 시장에 배분해 수익을 창출하는 ‘온체인 볼트(Vault)’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 (사진=디지털애셋)
'큐레이티드 볼트' 15조 규모
온체인 볼트 가운데 전문 큐레이터가 투자 대상과 자금 배분, 위험 한도 등을 관리하는 '큐레이티드 볼트(Curated Vault)' 시장에는 110억달러가 넘는 자금이 들어와 있습니다. 볼트 데이터 플랫폼 볼츠파이(vaults.fyi)가 지난 8월 공개한 '디파이 큐레이션 현황 2026(The State of DeFi Curation 2026)'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18개 프로토콜의 856개 볼트에 들어간 자금은 총 112억9000만달러(약 15조3453억원) 규모이고, 131개 큐레이터가 이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용자가 직접 대출 시장이나 투자처를 고르는 대신 전문 큐레이터가 투자 대상과 위험 한도 등을 정하는 온체인 자산운용 시장이 15조원 규모까지 커진 것입니다.
성장 속도도 빠릅니다. 볼츠파이에 따르면 큐레이티드 볼트의 총예치액(TVL)은 최근 1년 동안 39%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공급 측 디파이 TVL에서 큐레이티드 볼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5.24%에서 12.51%로 확대됐습니다. 이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로토콜 가운데 하나가 모포(Morpho)인데, 볼츠파이 집계에서 모포 기반 큐레이티드 볼트는 전체 조사 대상 자금의 46.2%를 차지했습니다. 약 52억2000만달러 규모입니다.
큐레이터가 투자처·위험 관리
볼트의 기본 수익 구조는 대출과 유사합니다. 이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을 예치하면 볼트가 이를 온체인 대출 시장 등에 공급하고, 차입자가 지급한 이자를 예치자에게 배분합니다.
최근 시장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투자 판단에 사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큐레이티드 볼트에서는 큐레이터가 투자 가능한 시장과 자산을 정하고 시장별 투자 한도를 설정합니다. 자금 배분을 담당하는 할당자(Allocator)는 이 범위 안에서 자금을 이동하며 수익률과 유동성을 관리합니다. 전통 금융에서 펀드매니저의 역할과 비슷한 셈입니다.
볼트가 자산운용 서비스로 발전하면서 중앙화거래소도 이용자와 온체인 시장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코인베이스(Coinbase)는 USDC(US달러코인) 렌딩 서비스를 통해 최대 연 10.3%의 수익률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고정금리가 아니라 시장 상황과 선택한 볼트에 따라 달라지는 변동 APY입니다. 이용자가 예치한 USDC는 코인베이스의 블록체인 베이스(Base)를 통해 모포 볼트에서 운용되고, 스테이크하우스 파이낸셜(Steakhouse Financial)이 투자시장과 위험 기준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크라켄(Kraken)도 올해 1월 ‘디파이 언(DeFi Earn)’을 출시했습니다. 이용자가 지원 자산을 넣으면 이를 USDC로 전환한 뒤 온체인 볼트에 배분하고, 볼트는 에이브(Aave) 등 제3자 대출 프로토콜을 통해 수익을 내는 구조입니다. 거래소 화면에서 자산을 넣으면 거래소와 연결된 볼트가 온체인 투자 과정을 대신 처리하기 때문에, 온체인 금융에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도 비교적 쉽게 볼트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만큼의 비용과 제약도 따릅니다. 크라켄은 ‘디파이 언’에서 발생한 수익 중 25%를 수수료로 받습니다. 볼트에 바로 꺼낼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하면 이용자가 출금을 요청하더라도 자산을 돌려받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중앙화거래소에 더해 전문 자산운용사도 볼트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디지털자산 운용사 비트와이즈(Bitwise)는 지난 1월 모포 기반 볼트 큐레이션 사업 진출을 발표한 뒤 9월2일 실물연계자산을 활용하는 ‘비트와이즈 프리미엄 RWA 볼트(Bitwise Premium RWA Vault)'를 출시했습니다. 지난 10일 기준 이 볼트의 예치액은 1364만달러(약 185억1084만원)입니다.
해킹·부실채권·출금 지연 위험
시장 확대와 함께 위험관리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우선 스테이블코인의 가격 이탈이나 RWA 담보의 신용·거래상대방 위험이 존재합니다. 큐레이터가 위험한 시장에 자금을 과도하게 배분하거나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손실이나 출금 지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수익률 역시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대출 수요가 줄면 수익률이 낮아질 수 있고, 높은 수익률을 위해 위험도가 큰 시장에 투자할수록 손실 가능성도 커집니다. 복진솔 포필러스(Four Pillars) 리서치 총괄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디지털자산 금융 혁신 사례와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 "온체인 볼트의 주요 위험으로 스마트 계약 오류, 잘못된 가격 정보, 담보 가치 하락, 유동성 부족 등을 꼽을 수 있다"며 "하나의 볼트가 여러 대출 프로토콜이나 토큰, 가격 정보 시스템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투자 판단과 책임’ 논의 시동
볼트가 이용자 자산을 실질적으로 배분·운용하는 성격을 띠면서 미국에서는 증권법과 투자자문 규제 적용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헤스터 피어스(Hester Peirce)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은 지난 7월22일 성명에서 금융 활동이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진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증권법의 적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는 "볼트의 수익창출 투자처를 선택하거나 자산을 재배분하는 주체가 있는 경우 구조에 따라 연방 증권법이 적용될 수 있다"며 "증권을 보유하거나 증권에 투자하는 볼트는 투자회사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볼트를 운용자의 개입 수준에 따라 규제를 구분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습니다. 포워드 인더스트리즈(Forward Industries)는 지난 10일 SEC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혁신 태스크포스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볼트를 세 유형으로 나눴습니다. 이용자가 범용 소프트웨어를 직접 설정하는 '타입 I-유즈(Type I-Use)', 미리 정해진 전략을 선택하는 '타입 II-팔로(Type II-Follow)', 전문 운용자가 재량으로 투자 판단을 내리는 '타입 III-어드바이즈드(Type III-Advised)'입니다. 운용자의 재량과 개입이 커질수록 규율도 강화하자는 구상인 셈입니다.
결국 온체인 볼트 시장이 커질수록 높은 수익률뿐 아니라 누가 투자 판단을 내리고 위험을 관리하는지, 손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누가 지는지가 더 중요해질 전망입니다. 거래소와 전문 자산운용사까지 시장에 진입하면서 볼트가 단순한 디파이(DeFi·탈중앙화금융) 상품을 넘어 새로운 자산운용 인프라로 확장하는 가운데 운용 구조의 투명성과 위험관리, 규제 기준 마련이 시장 성장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박재연 기자 damgomi@digitalasset.works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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