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아메리칸 드림’ 100년과 우리의 과제
2026-07-08 06:00:00 2026-07-08 06:00:00
미국이 건국 250주년을 맞았다. 여러 언론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되짚고 현주소를 묻는 논의가 활발하다. 그중 바드 칼리지의 화 쉬(Hua Hsu)가 <뉴요커>에 쓴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글(The Curious Career of “the American Dream”)이 눈에 띈다. 그는 이 꿈을 낡은 것이라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훌륭하고 소중한 유산으로 여긴다. 다만 사람들의 자발적 행동을 이끌고 사회를 한 방향으로 밀어 올리던 그 사회계약이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낡은 꿈의 복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는” 새로운 버전의 아메리칸 드림을 촉구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 자체가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 역사가 제임스 애덤스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음미할 만하다. 금융가에서 역사가로 방향을 튼 그는, 번영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에 이 꿈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취약함을 걱정하며 이름을 붙였다. 그가 말한 꿈은 자동차와 임금으로 요약되는 물질적 성취의 꿈이 아니었다. 누구나 타고난 역량을 온전히 펼치고, 출생이나 지위와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사회, 그리고 그런 사회를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간다는 약속이었다. 애덤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장소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개방된 의회도서관의 열람실을 꼽기도 했다. 열람실에서는 누구의 배움도 남의 배움을 밀어내지 않는다. 각자의 향상이 곧 모두의 향상이 되는 그 구조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은 좋은 사회의 청사진을 넘어 하나의 사회계약이 될 수 있었다.
 
이 계약은 오래도록 힘을 발휘했다. 전후 30년 동안 미국 경제는 두 배로 커졌고, 그 과실이 계층을 가로질러 나눠지면서 다음 세대는 앞선 세대를 넘어서리라는 기대가 상식이 되었다. 1940년에 태어난 사람이 부모보다 더 벌 확률은 92%에 이르렀다. 함께 올라간다는 감각이 실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이 계약을 잃어왔다. 제조업이 저물고 부가 금융으로 쏠리면서 중산층으로 오르는 사다리가 헐거워졌고, 부모보다 더 벌 확률은 이후 세대에서 절반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사다리가 좁아진 것이 외부의 사정이라면, 그 사정 앞에서 사람들이 택한 태도도 같이 살펴봐야 한다. 함께 올라갈 길이 막히자, 사람들은 그 길을 함께 넓히는 대신 남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 다투기 시작했다. 사회계약이 효력을 잃고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변질이 바깥에서 들어온 오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덤스의 꿈은 처음부터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었다. “타고난 역량을 온전히 펼치라”는 말은 함께 나아가자는 초대이기도 했지만, 남보다 더 높이 오르라는 계율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다”는 사회적 인정은 눈에 보이는 증표를 요구하기 마련이고, 그 증표로 가장 손쉬운 것이 부였다. 존엄을 나누자던 꿈에는 부를 겨루는 꿈으로 변질될 틈이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셈이다. 훗날 마틴 루터 킹이 이 꿈을 “나라가 떨쳐 일어나 그 신조의 참된 의미를 살아내는 일”이라 부른 것도, 함께 만든다는 그 약속을 새로 세우려는 촉구였다.
 
그런데 화 쉬는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에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말할 뿐,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길로 이르는지는 비워둔다. 그 공백을 채우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남는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무너진 것이 함께 만든다는 약속이었다면, 새 버전이 다시 세울 것 또한 그 약속이다. 이 갱신에는 두 가지가 맞물려야 한다.
 
하나는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불안을 걷어내는 일이다. 그 경쟁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다. 남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툼은 자리가 부족하다는 실감에서 나오고, 비교로 얻는 우위는 남들이 함께 올라서는 순간 다시 허물어지기에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일찍이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미래세대가 물질의 결핍에서 풀려나면 돈벌이를 삶의 목적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시간을 삶 자체에 쓰게 되리라 내다봤지만,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욕구가 결핍의 해소만으로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그 전망은 빗나갔다. 그러니 경쟁을 나무라기 전에 그 연료부터 줄여야 한다. 추락의 공포와 빚과 주거 불안에 쫓기는 이에게 이웃과 함께 나아가라는 말은 공허하다. 한때 학위와 내 집 마련은 삶을 떠받치는 투자였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지고 도리어 삶을 저당 잡힌다. 사다리에 오르는 일 자체가 추락의 위험이 된 셈이다. 이 불안을 덜어 줄 삶의 바닥, 곧 부채와 주거와 돌봄의 최소한을 함께 놓는 일이 먼저다. 화 쉬의 글에 나오는 한 학생은, “우리가 바라는 삶은 무엇이든 즉시 배송되는 편리함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위해 요리할 시간의 여유인가”라고 물었다. 끝없는 경쟁이 앗아가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을 살아갈 시간이며, 불안을 걷어내려는 까닭도 바로 그 시간을 돌려주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역량 향상과 사회적 인정의 무대를 사유지에서 광장으로 옮기는 일이다. 화 쉬는 흰 울타리, 곧 교외의 내 집으로 상징되던 옛 꿈이 더는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애덤스가 남긴 답의 실마리가 바로 도서관의 그 열람실이다. 울타리 안의 성취는 이웃과 담을 쌓아야 지켜지지만, 열람실의 배움은 문이 넓을수록 모두에게 이롭다. 소스타인 베블런에 따르면, 무언가를 잘 만들어 세상에 보태려는 마음은 오랜 생존 투쟁 속에서 인간에게 새겨진 본능으로서, 남을 이기려는 충동에 눌려 있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우열을 가리는 압박이 느슨해지면 그 장인 본능은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물질적 성취를 위한 분투 위에, 나의 나아짐이 남의 나아짐과 공존하는 우리 모두의 역량 향상이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삶의 유일한 목표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함께 짓는 기쁨을 되돌려 놓을 때, 사회계약으로서의 아메리칸 드림 또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조현 외교부장관과 제임스 헬러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함께 만든다는 약속이 가장 얇아진 자리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의 폭력을 옹호하고 그 피해자를 조롱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해지며, 담대한 산업정책에 기반한 지역균형발전의 새로운 시도조차 냉소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서로를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을 때 나타나며, 그 근저에는 함께 나아갈 목적지, 곧 공유된 국가 비전의 부재가 있다. 공동의 지향점이 없는 사회는 각자도생으로 흩어질 뿐 함께 매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좌표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국가의 운영 체제를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는 일이다. 이때 핵심은 개인의 발전과 나라의 발전을 하나로 잇는 데 있다. 우리는 나라를 완성된 것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실현해 가는 것이며, 정부의 몫은 그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은 낙오의 공포를 더는 개인에게만 떠넘기지 않도록 삶의 바닥을 함께 놓고, 한 지역의 성장이 다른 지역으로도 스며들도록 하며, 각자의 노력과 보상이 맞물리도록 정책을 짜고 집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분투가 홀로 각자도생하는 몸부림이 아니라 우리가 내건 신조를 함께 살아내는 걸음이 될 때, 분열은 비로소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다르게 꿈꾸는 일은 미국만의 난제가 아니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