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현철 기자]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민선 9기 출범 한 달여 만에 '경기도 재정 비상 상황'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정치권에선 이재명 대통령이 2010년 성남시장 시절 전격 단행한 '모라토리엄(국가 또는 지방정부의 채무상환을 일시적으로 연기하는 지급유예) 선언'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승부수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추미애, 5일 전격 재정 비상상황 선언…"미래 위한 결단"
지난 5일 추미애 지사는 경기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정 비상 상황을 선언했습니다. 추 지사는 "경기도는 새로운 공약 사업 추진은커녕, 이미 진행 중인 사업조차 온전히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이라며 "민선 8기에서 예산 부족을 이유로 상당수 민생 사업과 필수 사업의 올해 예산을 12개월분이 아닌 9개월분만 편성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기도는 당장 무려 7700억원 규모의 감액 추경을 진행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불과 2~3년 뒤에는 기존 채무를 갚기 위해 또다시 지방채를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며 "도민의 삶과 경기도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결단으로, 이 시간부로 경기도 재정 비상 상황을 선언한다"고 했습니다.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8월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청에서 경기도 재정 상황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명 '성남 모라토리엄' 연상…'7조 채무' 놓고 공방도
이번 선언은 이재명 대통령이 2010년 7월 성남시장에 취임한 직후 국내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걸 연상시킨다는 평가입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전임 시장의 판교특별회계 전용 사실을 공개하며 재정 위기를 알렸고, 이후 고강도 긴축 재정을 통해 3년6개월 만에 채무를 정리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자신의 대표적인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실제로 민선 9기 경기도지사 인수위원회는 지난 6월 브리핑에선 "(경기도 재정은) 적금을 해약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한도까지 당겨 쓴 셈"이라며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때의 마음이 이랬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추 지사도 지난달 1일 취임식에서 "민선 9기 경기도는 7조원이 넘는 채무를 안고 출발한다"며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재정 구조를 전면 점검하겠다"고 재정 개혁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다만 '7조원 채무'의 실체를 둘러싸고는 진단과 해석이 엇갈립니다. 경기도의 2024 회계연도 결산 공시상 공식 채무는 4조9848억원입니다. 인수위는 기금 차입금 5조1000억원과 지방채 1조2000억원 등 원금 6조3000억원에 이자 부담 약 7000억원을 더해 7조원으로 추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국민의힘 방성환 도의회 대표의원은 지역개발기금 3조9000억원, 통합재정안정화기금 1조2000억원, 지방채 1조9000억원을 합쳐 7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국민의힘은 민선 8기 김동연 전 지사의 과도한 확장 재정을, 민주당은 부동산 경기 침체와 세제 구조의 한계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어 차이를 보입니다.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지난 7월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차 접경지역 평화안전 연석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재정혁신TF 통한 고강도 체질개선…인사는 '신중 기류'
경기도는 지난해 3차례에 걸쳐 지방채 한도(9460억원)의 99.6%인 9430억원을 발행했습니다. 20년 만의 지방채 발행이었습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추 지사는 취임 직후부터 고강도 허리띠 졸라매기에 돌입했습니다. 재정혁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해 실·국 자체사업 7000억원대 구조조정 논의에 들어갔고, 9월 도의회에 약 7700억원 규모 감액 추경안을 제출할 계획입니다.
추 지사는 지난달 10일엔 진행 중이던 업무보고를 중단시킨 뒤 "성과뿐만 아니라 한계까지 솔직하게 평가하라"며 재보고를 지시했습니다. 이어 24일엔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을 만나 지방소비세율 인상(25.3%→35%)과 조정교부금 재원 조성 상한 신설 등 재정분권 제도 개선을 건의했습니다. 경기도의 취득세 수입이 2022년 11조원에서 올해 8조1000억 원으로 급감한 반면, 복지 예산은 14조원에서 19조6000억원으로 늘어난 걸 반영하자는 취지입니다.
다만 '법인지방소득세 공동세원화' 추진에 관해선 도내 반도체 도시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앞서 추 지사는 취임 첫날부터 경기도가 시·군의 법인지방소득세 절반을 먼저 가져가 쓰고, 나머지를 다시 시·군에 나눠 주는 방식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용인·화성·평택 등은 이를 '자치재정권 침해'라고 주장합니다.
도의회 내에선 감액 추경을 앞둔 기싸움이 치열합니다. 국민의힘은 "부서별 감액 규모를 할당해 사업을 끼워 맞추는 기계적 삭감은 재정 혁신이 아니다"라고 했고, 민주당은 세입 확충을 위한 구조 개선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재정 체질 개선에는 속도를 내는 반면 조직 인사는 다소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취임 한 달째지만, 실·국장 정기인사는 아직입니다. 민선 9기 고위직 인선은 주형철 경제부지사가 유일합니다. 행정2부지사와 신설 예정인 인공지능(AI) 수석 등 직속 보좌진 자리도 공석입니다. 이에 대해 추 지사는 지난달 29일 도의회 간담회에서 "업무보고가 제대로 이해될 때까지는 인사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며 "보고 결과를 사업 평가와 예산 편성, 인사에 종합적으로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8월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청에서 경기도 재정 상황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헌정사상 첫 여성 광역단체장의 '위기 극복' 능력 시험대
전임 김동연 지사의 대표 사업도 명암이 갈렸습니다. 이용자 202만명에 달했던 '기후행동 기회소득'은 예산 소진으로 8월 활동분부터 지급이 중단됐고, '기회경기수석'은 폐지돼 AI 수석으로 대체됩니다. '예술인 기회소득'도 연 150만원에서 75만원으로 줄어 문화계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반면 '대학생 천원매점'은 2개교에서 6개교로 확대됐습니다.
정치권에선 이번 재정 비상 상황 선언을 헌정사상 첫 여성 광역단체장인 추 지사의 리더십과 행정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시험대로 보고 있습니다. 단순한 위기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재정 건전화를 이끌어내야만 '성남시 모델'과 같은 정치적 자산으로 남아 평가받을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본격적인 시험대는 8월부터 시작됩니다. 첫 정기인사를 통해 민선 9기 도정의 윤곽이 드러나고, 9월 감액 추경에서 고강도 구조조정 대상이 판가름 납니다. 아울러 경기도가 제안한 지방소비세율 인상 요구가 중앙정부의 재정 개편 논의에 얼마나 반영될지도 관심사입니다.
김현철 기자 scoop_pres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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