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기구축함 조감도.(사진=한화오션)
2년 넘게 법적 분쟁과 행정 절차, 사회적 논란을 이어왔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화오션이 선정됐다. 장기간 표류하던 사업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결정이 곧 모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 방위산업이 반드시 치유해야 할 깊은 상처와 제도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KDDX 사업은 사업 자체보다 경쟁 과정이 더 큰 관심사가 됐다. 법적 공방과 행정 절차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사업 일정은 크게 지연됐고, 우리 해군의 전력 증강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여기에 최근 몇 년간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크게 상승하면서 사업성이 악화됐다. 수주에 성공한 기업도 충분한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 만큼, 이번 사업은 승자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 됐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과당경쟁의 후유증이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내 기업들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만 인식하는 사이 해외 시장에서는 대한민국 전체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호주 호위함 사업에서 최종 탈락한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국내 기업 간 협력 기반이 약했던 점 역시 해외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최근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서는 국내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아이러니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보여준다. 세계 함정 시장은 이미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 경쟁의 대상은 국내 기업이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세계 해양방산 강국들이다.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중요한 교훈을 남길 것이다. 수주에 성공한다면 민·관·군·산·학·연이 하나로 힘을 모았을 때 얼마나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국내 과당경쟁이 국가 경쟁력을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해외 대형 방위산업에서는 기업 간 과도한 소모전을 줄이고, 필요할 경우 컨소시엄 구성과 역할 분담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접근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책임 있는 기관과 기업 모두가 냉정한 자기 성찰에 나서야 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 큰 관리 책임은 방위사업청에 있다. 방위사업청은 법과 제도, 규정을 공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하며 사업을 관리해야 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러나 이번 사업에서는 갈등을 조기에 조정하지 못했고, 결국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가적 손실과 기업 간 갈등을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사업 관리 과정 전반을 면밀히 되돌아보고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한편,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
HD현대중공업 역시 기밀 논란으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데 대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화오션 또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장기간 지속된 분쟁이 국가 전략사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국가 전략사업에서는 기업의 권리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방위사업청은 장기간 사업 지연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원자재 가격 변동 등을 합리적으로 반영해 사업비를 현실화해야 한다. 적정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품질 저하와 전력화 지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고의 군함은 최고의 기술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사업 환경과 적정한 예산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화오션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만큼 사업의 성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필요한 분야에서는 HD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조선산업의 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협력하는 실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은 특정 기업 하나가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 생태계 전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KDDX를 둘러싼 갈등 역시 대한민국 방산이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 출발점은 갈등을 봉합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며, 방위사업청이 그 중심에서 기업 간 상처를 치유하고 협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대한민국 해양방산은 지금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기술과 잠수함 건조 역량을 바탕으로 미국 등 우방국과 함정 유지·보수(MRO), 공동 개발 및 기술협력 가능성도 확대되고 있다. 세계 함정 시장의 판도가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세계 해양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서 보여준 민·관·군·산·학·연의 원팀 정신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방위사업청과 공정거래위원회는 국가 전략사업에 걸맞은 법과 제도, 경쟁 질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해외에서는 하나의 국가대표팀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방산수출 4강은 뛰어난 기술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공정한 제도와 성숙한 경쟁문화, 그리고 국가를 위한 협력이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제 대한민국 방산의 경쟁 상대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 방산 강국들이다. 내부 경쟁에 역량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향해 힘을 모을 때, 대한민국은 세계 해양방산을 선도하는 진정한 방산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문근식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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