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7일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2023년 제정된 임금 투명성 지침을 자국 법률에 반영해야 하는 시한이었다. 이 지침은 채용 공고의 임금 공개, 지원자의 과거 연봉 질문 금지, 임금 결정 기준의 설명 의무 등을 담고 있다. 한국은 EU 회원국이 아니므로 직접 적용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지침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보상은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가. 한국 역시 이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지침은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목표로 한다. 같은 일을 하는 남녀에게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원칙은 1957년 로마조약에서 시작됐고, 이번 지침은 오랫동안 선언에 머물던 원칙을 실제 제도로 강제한 것이다. 한국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1996년 OECD 가입 이후 성별 임금격차가 회원국 중 가장 큰 수준을 유지했고, 2023년에는 29.3%로 OECD 평균의 두 배를 넘었다. 그러나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임금격차 자체보다, 이 지침이 던지는 또 다른 핵심이다.
핵심은 ‘설명 가능성’이다. 지침이 요구하는 것은 여성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왜 그만큼을 지급하는지를 객관적인 기준으로 설명하라는 것이다. 임금 차이가 있다면 회사는 그것이 성별이 아닌 합리적 이유에 따른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성별은 출발점일 뿐, 규제의 본질은 ‘보상은 설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근로자는 같은 가치의 일을 하는 집단의 평균 임금을 알 권리를 갖고, 회사는 이에 답해야 한다. 미국 역시 여러 주에서 채용 공고의 임금 공개를 의무화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에는 아직 EU와 같은 규제가 없다. 그러나 보상을 설명하라는 요구는 규제보다 먼저 구성원에게서 나왔다. 최근 반도체와 플랫폼 기업의 성과급 갈등도 핵심은 액수가 아니라 산정 기준의 공개였다. 보상이 회사의 재량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규칙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조직 안에서 자라난 것이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사정이 겹친다. 오랫동안 한국 기업의 성과주의는 하나의 암묵적 계약 위에 서 있었다. 기준은 회사가 정하고 직원은 그 결과를 믿는다는 계약이다. 이 계약은 신뢰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작동한다. 설명을 신뢰로 대체한 구조는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무너진다. 성과급 규모가 커지고 회사의 선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가 조직의 다수가 되면서 ‘믿으라’는 계약은 균열을 드러냈다.
더 큰 문제는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체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임금명세서는 개인의 임금만 보여줄 뿐 같은 가치의 노동이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개인의 투명성은 있어도 구조의 투명성은 없다. 더 근본적인 벽은 임금 체계 자체에 있다. 연공과 호봉이 임금을 지배하는 구조에서는 ‘같은 가치의 노동’을 비교할 기준이 없다. EU 지침은 기술과 노력, 책임과 근로조건이라는 네 가지 잣대로 직무 가치를 재라고 요구하지만, 이 평가는 직무를 잘게 나누고 등급을 매긴 직무 체계를 전제한다. 한국의 많은 기업에는 그 뼈대가 없다. 그동안 그 빈자리를 메워온 것은 계산식조차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성과 지표였다. 실제로 최근 몇몇 기업이 겪은 진통의 해법도 여기서 나왔다. 복잡한 내부 산식을 버리고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이라는 검증 가능한 규칙으로 갈아탄 순간, 갈등이 가라앉았다. 더 많이 지급해서가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규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임금을 설명하라는 요구는 직무 중심 임금 체계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최근 성과급 갈등의 핵심은 성과급 산정 기준의 공개 여부였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보상이 회사 재량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규칙에 따라 결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카카오지회 조합원들이 사측의 임금 인상률과 성과급 등 보상 체계를 규탄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 문제를 남의 일로 여길 수는 없다. 유럽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이미 규제의 직접 적용 대상이다. 유럽의 대형 고객사가 납품 협력사에도 같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국내에 관련 법이 있든 없든 수출 기업은 데이터로 공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기후에서 시작된 지속가능성 공시가 이제 ‘제2의 재무제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지금은 기후가 중심이지만, 공시 대상이 인적자본과 보상으로 넓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여기에 반도체와 인공지능 인재를 둘러싼 쟁탈전이 겹친다. 예측할 수 있고 납득이 가는 보상은 규제이기 이전에 사람을 얻고 지키는 전략이다. 규제가 도착하기 전에 시장과 공시가 먼저 상륙한다.
반세기 동안 한국 기업의 보상은 ‘믿으라’는 말 위에 서 있었다. 이제는 ‘설명하겠다’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직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 기준을 구성원과 공유하는 기업이 결국 사람과 신뢰를 먼저 얻게 될 것이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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